작가는 고려 말년 공양왕을 끝까지 지키려다 이방원의 자객에 의해 선죽교에서 피살된 만고 충신으로서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유학자,
이방원의 회유 시조(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에 대한 순절 결심의 답시로 보낸 목숨 건 절명시조(絶命時調)다.
완벽한 음수규칙(音數規則을 지킨 정형 정격의 시조로, 역동 우탁의 첫 시조(탄로가) 이후 반세기 만에 절명시조의 맥을 이은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 역시 우리 시조의 빛나는 문화재로 높이 평가받는다.
우리 시조는 초장 3,4,4(3),4/ 중장 3,4,4(3),4/ 종장 3,5,4,3/ 총 45자(音數)를 갖추어 형식적 규칙을 지키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는다.
위 시조는 초장과 중장은 자수규칙과 음수규칙을 완벽하게 지켰다. 다만 종장에서 3,6,4,3이 되어 전구의 뒷 소절에서 1자가 늘었다.
그러나 소리로 볼 때 “일편단심이야”가 자수는 6이지만 소리로는 “이야”가 1음수로 소리나, 5음수가 되어, 음수규칙(音數規則)으로는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아 확실히 정형이다.
특별히 종장의 3 5 4 3 음수규칙에서 전구 앞 소절 ‘3’은 절대불변으로 정하고, 뒷 소절 ‘5’는 ‘5~7’로 융통성을 주되 음수 ‘5’로 소리 내도록 정해 두었다.
우리 시조는 700년 전 첫 시조에서부터 조선 500년에서도 규칙을 잘 지켜온 점을 볼 수 있다. 광복 후 우리 시조는 서양시의 자유분방한 표현기법의 영향을 받아 크게 변질되고 있다. 민족문화는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훌륭한 전통적 원형은 반드시 보전 전승 발전 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