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시자는 조선 초기 삼촌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함에 의분을 느껴,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정신으로 30대 젊은 생애를 끝낸 사육신의 한 분.
그의 절명 평시조 ‘절의가’는 세조의 왕권 찬탈의 불의를 향한 자신의 충절 불굴의 의지와 절개를 시조를 통해 포효하는 작품으로, 세조의 귓속말(내 편이 되어주면 살려줄게)에 맞서 장엄한 죽음을 택했고, 이 시조는 선비정신을 읊은 세계사에 기록될 유언시가 되었고, 음절규칙을 잘 지킨 정격시조로 알려진다.
이 시조는 세조가 형조참판 박팽년을 회유코자, 자기 할아버지(이방원)처럼 김질(박팽년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에 동참하다가 배반한 자)에게 ‘하여가(何如歌)’를 읊게 하자, 김질에게 즉답한 절명시조로, 초장{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에서 세조와 그와 함께한 간신배(까마귀)는 혹독한 현실(눈비) 아래 요행(희려다가)과 저주(검어짐)를 분별치 못한다고 책하고, 중장{야광(夜光)- 명월(明月)이야/ 밤인들 어두우랴?}에서 충신들(야광 명월)은 단종 복위 여부를 떠나 이 밤(고문)에도 충절의 빛을 발할 것을 장담하며, 종장{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에서 단종에 대한 충절을 정몽주의 ‘단심가’를 인용 절규하고 있다.
“나는 수양군에게 신(臣)이라고 자인한 사실도 없었다.”고 주장하니, 충주에서 충청도 관찰사로 복무할 때 올라온 모든 공문서를 다시 확인해 보니, 정말 “신(臣) 박팽년”이라 서명할 것을 “거(巨) 박팽년”이라고 쓴 사실을 확인하고 세조도 혀를 찼다고 한다.
세조의 박팽년 처형은 가혹하였고, ‘삼족멸망의 형’까지 집행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아들 8명, 동생 1명을 모두 처형해 대를 끊고 씨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아내의 기지로 유복자를 은거 출산하여 대를 이어오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