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람시론] 외국의 유명한 다국적기업 면접시험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면접관이 응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당신이 폭우가 쏟아지는 날 차를 몰고 가다가 한적한 시골 정류장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는 세 사람을 보게 됐다. 첫 번째 사람은 오랫동안 사모하고 있었지만 말 한 마디 건네 보지 못한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둘째는 당신의 생명을 구해주었지만 제대로 보답 한번 못한 옛 친구 또 한 사람은 아파서 곧 쓰러질 것 같은 할머니가 있었다. 그런데 차는 한 사람밖에 더 태울 수 없는 고급 스포츠카라면 이 상황에서 당신은 누구를 태울 것인가?
우린 언제나 주어진 상황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다. 흔히 여기에 매이면 열려있는 더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면접관이 제시한 그 상황에서 정말로 아파 보이는 할머니를 태워드려야 할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친구에게 보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옛 친구를 태워야 할까? 하지만 그 두 가지 선택은 꿈에 그리던 여인과의 만남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건 우리가 실제 현실에서도 만날 수 있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최종 면접을 본 200명 넘는 인원 중 한 사람만 이 상황에 적절한 대답을 하고 채용됐다고 한다. 그의 대답은 상식을 뛰어 넘었고 또한 시원하고도 간단했다. 자신의 자동차 키를 옛 친구에게 주어 아픈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셔가게 하고는 꿈에 그리던 여인과 빗속에 이야기를 나누며 버스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창조적 소수자들이 제시하는 획기적인 발상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에 의해 새로운 물줄기로 시대의 흐름이 바뀔 때가 많았다. 그러나 또 다른 쪽에선 예나 지금이나 주어진 환경과 기존 사고의 틀에 갇혀 스스로 불통이 되거나 앞서가는 이들을 배척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2천 년 전 유대 땅에 와 천국복음을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요한복음은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증거하고 있다. 조선 중종 때 사림파 성리학자로 개혁의 아이콘이었던 정암 조광조를 축출한 세력들도 그와 다르지 않다.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반정공신들은 궁인들을 사주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를 만들어 ‘조씨가 왕이 될 것’이라 꾸며낸 후 그를 역모로 몰았던 것이다.
또한 조국광복을 위해 한 평생 목숨을 바쳤던 많은 독립투사들이 해방 후 이 나라에서 어떤 좌절감을 느꼈었는지…… 우리는 역사를 교훈 삼아야 한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상해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던 미군정 치하에서 남북분단이 고착될 것을 우려했던 백범 김구 선생 그리고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도 그러한 기득권 세력에 배척당한 선구자였다. 조국의 미래를 꿈꾸며 일생을 바쳤지만 권력에 눈먼 정치 세력과 그들의 하수인들에게 암살당하거나 오히려 36년간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고 친일했던 이들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멸시를 받았던 것이 우리의 답답한 현실이었다.
지금의 정치도 나아진 것이 없다. 거대 야당은 대추나무 연 걸리듯 온갖 사법리스크에 몰린 당대표 하나를 감싸고돌다 같이 수렁에 빠져 민생을 챙기지 못하고 있고, 성숙이 덜된 아이들처럼 윤석열 정부도 모든 어려운 문제는 앞선 정부 탓으로 돌리는 남탓정치를 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그렇게 득달 같이 물어뜯던 언론도 정권이 바뀌었다고 필봉이 부드러워지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진영의 갈등도 남아 있는데다 언론도 기업이고 기업 중에서도 언론을 가지고 있으니 정보를 가장한 주장이 난무하는 혼돈 속에서 정세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겠다.
제임스 메디슨이 민주주의의 고전인 ‘연방주의자 논설’에서 밝힌 대로 모두 같은 생각을 갖게 하든가 자유를 없애지 않는 한 갈등은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갈등은 제거될 수 없고 오직 조정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한 이해와 조정의 노력과 아울러 무엇보다 민주 정치의 근간은 국민을 섬기는 것이다. 국가의 주인이 누구인지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마음속에 간직한 정치인이라면 뜻을 얻었다 해도 방종과 거만함으로 군림하지 못할 것이다. ‘정관정요(貞觀政要)’에는 정성을 다하면 호(胡)나라와 월(越)나라까지도 하나가 될 수 있고, 거만하게 대하면 피를 나눈 부모 형제까지도 행인처럼 되어버린다 했으니 정치에 몸담은 이들은 새겨야 할 말이다.
권력에 맛들인 정치인 그리고 그와 유착된 언론이든 종교 세력이든 이 나라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다. 약삭빠르게 시류에 편승해 얼굴과 복색을 바꾸는 자들이 당대엔 권세를 누리고 살아갈지 모르나 그들이 권세를 탐하며 치졸한 방법으로 이해득실을 따졌던 속마음까지도 역사는 투명하게 기록해 후세에 거울로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나라 격동의 시대 그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깨어있는 국민들이 이 땅을 지키고 있는 한 개혁을 향한 역사의 시계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대이다. 나라를 걱정하고 대안을 찾아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 민생은 뒷전이고 자기와 다르다고 한 편이 아니라고 배척하고 비난만하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벗어나야 한다.
코페르니쿠스에 이어 당시 카톨릭이 금기시하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됐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판결 후 법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 지금 이 혼란의 시대에 바로 옳은 것을 ‘옳다’ 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이 땅의 역사의 수레바퀴는 전진하며 밤이 지나면 또 어김없이 새로운 아침이 오는 것이다.